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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일보 Why?][이소룡 70주년] "아뵤오~"

작 형 2011. 1. 6. 17:59

 다음 내용은 조선일보 신문 스크랩, 박은주 기자「[Why?][이소룡 70주년] "아뵤오~"」를 그대로 퍼온 것입니다~

 원문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26/2010112601305.html)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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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모든 사람처럼 당신도 이기는 법을 배우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지는 방법 따위는 배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패배하는 법을 배우면 패배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당신은 자유롭고 조화로운 강물처럼 될 것이다." (이소룡)

 

 11월 27일은 영화배우 이소룡(李小龍·이진번), 브루스 리의 70번째 생일이다. 아시아 최초의 할리우드 스타였던 이소룡은 1973년 7월 20일 나이 서른셋에 사망했지만, '전설적 배우'를 갈망하는 쇼비즈니스업계에서 그는 여전히 팔리는 이름이다.

 

 절권도
 "이기는 데 3분이나 걸리다니…
 더 빠른 '싸움의 기술' 만들자" 그렇게 창안한 무술

 

 1969년 미국 영화 '말로이(Marlowe)'로 영화 데뷔를 했지만, 그가 '제대로' 주연한 영화는 고작 5편. '당산대형(The Big Boss, 1971)', '정무문(Fist of Fury, 72)', '맹룡과강(The Way of the Dragon, 72)' '용쟁호투(Enter the Dragon, 73)'와 그가 돌연 사망하는 바람에 촬영을 마치지 못한 '사망유희(The Game of Death, 78)'가 있다.

 

 제임스 딘과 흡사하게 그는 '과작(寡作)'인 채로 사망, 일종의 '요절신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사후 40년 가까이 그의 팬덤이 유지되는 것은 그를 대체할 그 어떤 아시아 스타도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성룡과 이연걸, 주윤발 같은 중국계 스타가 할리우드에 진출해 나름의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이소룡의 카리스마를 넘기는 어려웠다. 누구도 이소룡이 살아서 보여줬던 '동양 무술의 괴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경극배우인 부모가 미국 순회 공연 중이던 194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생후 3개월째 홍콩으로 돌아왔다. 13세에 전설적 무술가 엽문(葉問)에게 '영춘권(詠春拳)'을 5년간 사사한 그는 19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애틀과 오클랜드에 도장을 차려서 중국인은 물론 미국계 학생들에게 이 무술을 전파했다.

 

 그가 절권도를 창안하게 된 것은 공격성이 약한 영춘권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 1964년 어느 날 오클랜드 도장으로 쿵푸인들이 찾아왔다. "왜 비중국인들에게도 영춘권을 가르치느냐"는 시비였다. 둘은 다음날 결투를 벌였다. 양측 대결은 3분 만에 이소룡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때 이소룡은 대결이 '3분이나' 걸린 데 좌절, 더 빠른 '싸움의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67년 비로소 완성된 게 절권도(截拳道)다. 그가 무술(martial art)을 '창안'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열광의 도를 더욱 뜨겁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도 그에 대한 추종을 열광으로 바꿔 놓는 대목. '정무문'은 '이소룡=반일'이라는 이미지를 제대로 심어준 영화. '정무문'의 주인공 첸은 사부를 살해한 간악한 일본 홍백파 무리를 향해 쌍절곤 하나 들고, 혈혈단신 쳐들어가 그들을 박살내버린다. 그 모습에 범(凡)중국인은 물론 한국, 미국 관객들까지 열광했다. '정무문'은 우리나라에서 그의 사망 일주일 후인 1973년 7월 27일 개봉, 서울 개봉관에서만 31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그해 최다 관객 영화로 기록됐다.

 

 이소룡 연구자들은 영화 속 캐릭터가 곧 그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이소룡이 자라난 홍콩은 일찍이 영국에 할양됐고, 1941~45년 중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이소룡의 집(홍콩 구룡 나탄 로드 218번지) 앞이 바로 일본군 캠프. 이소룡의 어머니는 어린 이소룡을 발코니에 데리고 나와 군부대에 걸린 일장기를 보여주면서 일본의 침략이 부당하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외세 혐오 감정을 '조기교육'받은 셈이다. 이소룡 지인들은 "어릴 적 이소룡이 영국계 소년들과 자주 싸움을 한 것도 외세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철학자
 100달러 들고 미국에… 닥치는대로 독서
 워싱턴대학에서 철학 전공도

 

 이소룡 사후, 그를 '철학자'로 규정하려는 움직임도 뜨겁다. 1959년 100달러를 들고 배에 올라 미국으로 향한 이소룡. 샌프란시스코에 내린 그는 한동안 댄스강사로 밥벌이하면서도 '외국인처럼 말하는 미국 시민권자'라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고유한 영어 표현법을 익히는 데 시간을 쏟았다. 12살 이전까지 영어를 배운 적이 없어 미국식 액센트까지 배우지는 못했지만, 미국 대중은 그 어투를 '쿨하다'고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많이' 읽은 덕에 그의 글쓰기는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주립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기도 했던 그는 동양의 음양사상을 무술로 표현하는 방법을 상당 분량의 글로 남겨 놓았다. 동양무술 관련 단어라고는 '유도(Judo)'가 거의 유일(미국 옐로페이지 기준)했던 60년대 미국. 그 땅에 쿵푸(kung fu 혹은 gung fu), 영춘권(Wing Chun technique), 절권도(Jeet Kune Do)' 같은 단어를 미국에 퍼뜨린 것 역시 이소룡, 브루스 리의 호소력 있는 글쓰기 덕이었다.

 

 철학적 기반에 더한 것은 다양한 시청각적 '특허품'의 덕도 크다. 그 어떤 배우도 넘어서지 못한 '빨래판 복근', 수많은 대중문화 장르에서 수없이 패러디된 '노란색 추리닝', 그리고 활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고양이 울음 같기도, 새의 비명 같기도 한 괴조음(怪鳥音) 역시 이소룡 신화의 시청각적 요소를 완성하는 요소들이다.

 

 '식스팩 민족주의자' 혹은 '빨래판 복근의 동양 철학자'. 사후 40년이 가깝게 이소룡 신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 이질적 요소들의 묘한 결합 때문인지도 모른다.

▲ 유혈이 낭자한 영화가 특기라 ‘헤모글로빈의 시인’으로 불리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비디오가게 점원 시절, 그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정창화 감독),

이소룡의 무협영화를 보며 꿈을 키웠다. 우마 서먼(사진)을 주인공으로 세운 ‘킬빌 vol.1’에서는 주인공 혼자 수십명의 적을 상대하는 이소룡식 설정은

물론 노란색 트레이닝복까지 등장시켜 ‘이소룡에 대한 흠모’를 증명했다. / 영화 킬빌 vol.1 포스터


 빨래판 복근
 "가장 공격을 잘 받는 명치를 단련하라"
 TV 볼 때도 아령 들고 윗몸일으키기…허리 28인치, 매일 4시간 '끝장' 운동

 

 "이소룡 같은 근육을 가진 사람은 많지만, 그처럼 날쌔게 움직이는 사람은 없다."

 

 5피트7인치(171㎝)에 불과한 이소룡의 몸에 동·서양이 열광했던 이유는 그의 완벽한 빨래판(washboard) 복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더불어 '근육질은 둔하다'는 편견까지 깼다.

 

 이소룡은 "배가 단련되지 않으면 그 어떤 스파링도 의미가 없다"며 특히 복근 단련에 공을 들였다. 지금처럼 복근에 대한 열광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었다. "배는 가장 공격을 잘 받는 부위이며 동시에 가장 운동성이 떨어지는 부위"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명치'를 상반신의 핵심 부위로 봤던 그는 이 부분을 단련하기 위해 복근을 만들고, 동시에 배가 공격당했을 때 팔꿈치로 막을 수 있을 정도의 민첩성을 갖도록 '끝장'을 볼 정도로 운동했다.

 

 그는 28인치 내외의 허리 둘레를 유지하기 위해 TV를 보는 동안에도 아령을 들고 윗몸일으키기(올릴 때는 빨리, 내려갈 때는 천천히 하는 고통스러운 방식으로)를 하거나 지방 분해효과가 있는 사우나 벨트를 하고 실내자전거를 탔다. 그는 복근운동과 더불어 하루에 15~45분 달리기나 실내자전거 타기 같은 심폐운동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대략 하루 4시간 정도의 운동을 했는데, 그의 운동 노트에는 〈허리 트위스트-90회 4세트, 싯업(sit-up) 트위스트-20회 4세트, 하체 올리기-20회 4세트, 리닝(leaning) 트위스트-50회 4세트, 개구리점프킥-50개 4세트〉식의 복근 단련 운동 과정이 적혀 있었다. 특히 벤치에 누워 어깨 힘과 배, 등의 힘만으로 거의 '공중에 몸이 수평으로 떠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드래건 프래그(dragon flag)' 운동법은 그가 개발한, 궁극의 복근 단련법으로 알려져 있다.

 

 '용쟁호투'의 프로듀서는 "그의 몸에는 단 1인치의 지방도 없었다. 그의 몸은 강철처럼 완벽한 근육 자체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공짜로 얻어진 건 아니었다. 그는 무리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여러 차례 상처를 입었는데, 그가 진통제에 중독된 것도 바로 그 부상 때문이었다.

 

 

 '노란 추리닝'
 이소룡 하면 떠오르는 트레이드 마크
 열혈팬 쿠엔티 타란티노 감독 '킬빌'에선 여배우가 입어 또 한번 세계적 화제

 

 1973년 이소룡이 세상을 뜰 당시 촬영해놓은 '사망유희'의 분량은 약 100분. 로버트 클라우스 감독은 이소룡이 출연한 장면 중 15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새로 촬영하거나 다른 영화에서 가져와 103분에 달하는 영화를 완성했다. 이 때문에 "짜깁기됐다. 이건 이소룡 영화가 아니다"는 불만도 있지만, 이 영화에 입고 나왔던 노란색 트레이닝복(jumpsuit)은 쌍절곤과 더불어 이소룡의 트레이드 마크로 남았다.

 

 주로 검은색 도복이나 중국 전통복을 입고 영화 속 무술 장면을 찍었던 그가 모토사이클용 트레이닝복을, 그것도 노란색을 선택한 것에 대해 그의 아내 린다 에머리는 "무술을 하는 데 어떤 옷의 형태나 색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일종의 '반어법적 예시'가 '전범'이 된, 이 아이러니.

 

 이소룡이 촬영 때 입었던 트레이닝복은 당시 스턴트 대역(stunt double)으로 나왔던 멜 노박이 소유하고 있으며 6만달러에 경매 사이트에 매물로 나와 있다. 이소룡이 신었던 노란색 아디다스 스니커는 지난해 마카오 경매에서 1만2500달러에 팔렸다. 이 경매에서는 또 다른 대역이 입었던 노란색 트레이닝복이 1만8750달러에 팔렸다.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주요 모티프로 사용한 영화는 부지기수. 정창화 감독의 '죽음의 다섯손가락'에 대한 경외심을 끊임없이 표현하는 등 동양 무술영화에 '꽂혔던'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도 잊지 않았다. 그는 영화 '킬빌 vol.1'에서 주인공 우마 서먼에게 노란색 트레이닝복과 노란색 운동화를 신게 했다. 영화가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며 노란색 트레이닝복과 아식스 오니츠카 타이거 운동화는 또 한번 화제의 아이템이 됐다. 역시 이소룡의 열렬한 추종자인 주성치 감독·주연의 '소림축구'에서는 현존 홍콩 배우 중 이소룡의 외모를 가장 많이 닮은 것으로 평가받는 진국곤이 이 노란색 옷을 입고 나온다. 이연걸의 '탈출(High Risk, 1995)'은 물론 미국 B급 영화 '라스트 드래건(1985)', '기숙사 대소동(Revenge of the Nerd)'에서도 '노란 추리닝'은 감초로 등장한다. 쌍절곤 역시 질풍노도 시절의 소년들에겐 '로망'이었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의 모습이 그 대표적인 예.

 

 

 괴조음(怪鳥音)
 고양이 울음 소리? 새의 괴성?… 카리스마 작렬하는 '사운드 아이콘'

 

 '맹룡과강'의 콜로세움 결투신. 오직 고양이 한 마리가 증인으로 나선 가운데 이소룡은 척 노리스와 한 판 대결을 벌인다. 고양이의 모습과 결투 장면이 교차 편집된 장면에서 바위처럼 굳건한 척 노리스와 고양이처럼 유연한 이소룡의 대결도 볼거리지만 고양이 울음과도 흡사한 괴조음(怪鳥音)은 긴장감을 더욱 강조했다. '아뵤오~'로 표현되는 그의 기합 소리도 특징적이긴 하지만, 이 괴조음은 이소룡의 카리스마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사운드' 아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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