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는 스페인 축구에 열광했나
사람들은 왜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승한 스페인 축구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저 그들이 주고받는 아름다운 패스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일까?
이 질문의 답을 얻으려면 우선 현대 축구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계 축구의 변화에 잘 적응했으면서도 결코 개성을 잃지 않았던 스페인 축구의 매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축구 민족주의, 서로 다른 스타일을 만들다
월드컵이 시작된 1930년은 서구사회에서 축구 민족주의가 확립되는 시기였다. 축구가 정치와 깊은 관련을 맺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그 대표적 예다. 이탈리아는 1934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 우승을 위해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들까지 대표팀에 합류시켰다. 월드컵 국가주의의 시작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가마다 개성적인 축구 스타일이 태동했다. 비가 많은 기후 탓에 잉글랜드에서는 ‘킥 앤 러시’ 스타일이 생겨났다. 롱 킥을 받아서 득점을 할 수 있는 강인한 스트라이커들이 탄생했다. 골을 잘 넣는 스트라이커들은 그라운드의 귀족으로 대우받았다.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커피 등 재식농업에 동원되어 착취받는 흑인 노예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았던 브라질은 드리블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린 선수들의 천국이었다.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넣어야 진짜 골이라고 생각했던 가린샤(Garrincha, Manuel Francisco dos Santos 1933~1983)나 펠레(Pele, Edson Arantesdo Nascimento 1940~)는 그런 의미에서 ‘축구 천재’들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을 쟁취한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들도 그들만의 축구 스타일을 선보였다. 1966년 북한은 ‘천리마 운동’의 정신으로 무장한 강인한 체력의 선수들로 8강에 올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북한 선수들처럼 90분 내내 뛸 수 있는 팀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월드컵의 화두는 효율성과 세계화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남미의 ‘축구 천재’들과 유럽 축구의 귀족인 스트라이커들은 입지가 좁아졌다. 이 월드컵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은 네덜란드 ‘토털 풋볼’ 때문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사실상 고정된 포지션이 없는 팀이었다. 수비와 미드필더, 그리고 공격수들 간의 유기적인 포지션 변화가 경기 도중 계속 이뤄졌다. 네덜란드의 팀 전술은 상대에겐 그 어떤 개인기보다 두려운 것이었다.
네덜란드 축구는 다른 나라가 쉽게 흉내 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아이디어는 널리 퍼졌지만 실제로는 크게 유행하지 못했다. 80년대 월드컵도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Maradona, Diego Armando. 1960~)라는 축구 천재가 지배했다.
토털 풋볼로 한풀 꺾인 축구 천재의 시대는 90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사실상 끝났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서독의 ‘압박축구’ 스타일 때문이다. 중원에서부터 드리블 천재들이 아예 뛰어 놀 공간을 주지 않는 작전이었다.
‘압박축구’는 전 세계적인 유행코드가 됐다. 순간적으로 상대 공격수를 에워싸는 협력수비를 못 하는 팀은 더 이상 월드컵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개인기는 결정적 순간에만 사용하는 기술로 내려앉았다. 세계에서 가장 우연성이 큰 스포츠인 축구를 더 이상 낭만적인 예술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경기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1994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드리블 위주의 아름다운 삼바축구와 결별하고 유럽축구의 효율적 수비 전술을 대표팀에 이식했다. 축구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그들의 수비와 압박축구는 브라질에 우승컵을 선사했다.
4년 뒤 프랑스의 우승도 그들만의 ‘아트사커’를 벗어 던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1998년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아기자기하고 세밀한 패스를 위주로 한 전통적 공격방식에 치중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중원에서부터 수비 조직을 강화하는 실리를 택했다. 지단 등 이민세대 선수들이 이룩한 프랑스 축구의 세계화는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에 너무 자만했던 프랑스 주류 사회에 큰 메시지를 던졌다.
2006년 월드컵 우승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전통적으로 카테나치오(빗장수비)로 불리는 ‘수비축구’를 중시했던 이탈리아의 우승은 ‘골 넣는 수비수’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탈리아는 수비수도 공격력이 없으면 외면당하는 세계 축구의 흐름에 편승했기 때문에 우승이 가능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몇몇 국가들의 카멜레온 같은 변신은 성적 향상으로 직결됐다. 3위를 차지한 독일은 신장과 체력을 적극 활용하는 기존의 딱딱한 게르만 전차군단의 이미지가 많이 사라졌다. 대표팀에 대거 수혈된 이민세대 선수들의 개인기 덕에 독일 공격은 더 날카로워졌다. 준우승한 네덜란드의 경우도 그랬다. ‘지더라도 아름다운 골을 넣어야 한다.’는 네덜란드 축구 철학은 철저하게 ‘이기는 축구’로 바뀌어 있었다.
자유와 규율이 조화를 이룬 스페인 축구의 힘
스페인 축구도 효율성과 세계화의 산물이다. 그들의 패싱 게임은 공 점유율을 높이면서도 체력을 최대한 비축할 수 있는 전술적인 장점이 있었다.
스페인 축구의 패싱 게임은 네덜란드 감독들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루이프(Hendrik Johannes Cruijff, 1947~), 반 할(Aloysius Paulus Maria van Gaal, 1951~) 등의 지도자는 스페인 축구의 대표적 클럽인 바르셀로나를 드리블의 팀에서 패스의 팀으로 탈바꿈시켰다. 두 감독은 몸싸움에는 약하지만 기본기가 뛰어난 스페인 선수들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정밀한 패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스페인 축구에는 특별한 뭔가가 더 있다. 스페인 축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패스를 통해 규율을 세운다. 하지만 그 패스 하나 하나에는 선수들의 개성과 자유가 묻어났다.
자기 파트에 충실하면서도 아름다운 하모니를 추구하는 합창이었다. 스페인 축구에는 남미 축구의 자율성과 유럽 축구의 규율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축구 천재도, 무명용사도 필요 없었다. 모두가 똑같은 주인공이었다.
K리그 유소년 시스템 정착에 더 투자해야
남아공에서 한국이 16강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유럽파였다. 2002년 월드컵 4강으로 급물살을 탔던 한국 축구의 세계화가 결실을 본 셈이다.
효율성의 측면에서도 한국 축구는 달라져 있었다. 선수들은 무작정 많이 뛰지 않았다. 공의 흐름을 읽는 눈이 전반적으로 밝아졌다. 전술적 측면에서도 유연해졌다. 허정무 감독이 뿌리 내린 ‘소통의 리더십’으로 이제 우리도 ‘몸’이 아니라 ‘머리’로 축구 강국과 경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렇지만 월드컵에서 한국이 더 효율적인 축구를 하려면 부족한 게 있다. 패스와 슛 등의 기본기다. 축구 선수들은 중·고등학교에서 기본기를 쌓아야 한다. 하지만 대회 성적과 명문대 진학을 위해 기본기는 자주 무시됐다. 골을 넣기 위해 틀에 박힌 플레이만을 연습하는 어린 선수들은 순간 대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창조적인 패스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프로 2군에서 착실히 기본기를 쌓은 이청용이나 자유로운 분위기의 호주에서 축구 유학 생활을 했던 기성용이 어린 나이에도 남아공에서 대담하고 세련된 플레이를 거침없이 할 수 있었다.
학원 축구의 대안으로 K리그 유소년 시스템이 잘 정착해야 한국 축구는 더 건강해질 수 있다. 그래야 경쟁관계에 있는 학원 축구도 ‘성적 지상주의’의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있고 유럽파도 더 늘어나게 된다. 개개인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살릴 수 있는 하부구조가 있어야 한국 축구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이종성 | 프레시안 객원기자. 영국 드몽포트 대학교 스포츠문화사 박사과정.
논술로 들여다보기
한국축구에 ‘창의성’과 ‘다양성’을 불어넣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관련 컬럼
■ 정말 축구 잘하는 나라 되려면 (이정희_ Deloitte Touche/안진회계법인)
■ 월드컵의 경제적 효과 (유병규_현대경제연구원)
■ “나의 월드컵은 끝났다” (임철순_한국일보)
※ 이슈투데이 홈페이지(http://www.issuetoday.com)에서 ‘월드컵’으로 검색하시면 해당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용어해설
재식농업(栽植農業)
열대 또는 아열대 지방에서, 자본과 기술을 지닌 서구인이 현지인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쌀·고무·솜·담배 따위의 특정 농산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경영 형태.
출처: 이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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