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1910년 7월 25일에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어요.
익자, 두자를 쓰신 내 아버님께서는 목사님이셨죠.
난 어렸을 때부터 꽤 활달했어요.
10살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지만, 이름을 날린 건 빙상선수로였어요.
상도 좀 받고 이름을 날린 덕에, 자화자찬이지만, 갈래머리 한 여학생들도 날 꽤 좋아했던 걸로 기억해요.
내가 축구를 시작하게 된건, 18살, 경신중학교에 다닐 때였어요.
정말 우연이었지.
실업 전수 학교 구락부랑 우리 경신 학교 축구 구락부가 붙었는데, 그때 우리가 8대 0으로 이겼어요.
그때 날 눈여겨 본 사람들이, 메이지 신궁 대회에 집어넣었는데, 그때 우리 구락부가 우승을 한거에요. 그래서 국가 대표로도 뽑히고 베를린에도 가게 된거요.
그때 내 나이가 스물 여섯이었어요.
불행히도, 그땐 일본 제국 강점기였어요.
난, 가슴에 일장기를 달 수 밖에 없었지.
구락 내에서도, 내가 유일한 조선인이라, 이런 저런 핍박도 많았었어요.
내가 이런 핍박을 받아가면서까지, 내가 내 원수 나라의 국기를 가슴팍에 달고서, 다른 나라에 가서 원수 나라 위해 운동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어요
울분이 하늘을 칠만큼 피가 끓는 청춘이라, 하루에도 열두번씩 짐을 쌌다 풀었다 했어요.
그때, 누군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해줍디다.
‘이 대회는 세계 대회다.
우리 조선이 영원히 일본 치하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조선이 해방되는 그때에, 우리 조선의 국기를 직접 가슴에 달고 운동을 하고 축구를 하게 될 어린 선수들을 생각해봐라,
비록 일본 치하에서지만, 위대한 세계 대회에 나가서 뛰었다는 것은, 그 어린 선수들을 위해 큰 도움과 경험이 되지 않겠느냐.
당신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더 멀리 내다봐라.
당신을 짓밟고 있는 굴욕에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당신이 비겁하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의 뒤를 따라 나오게될 우리 조선의 어린 선수들을 위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정말 크게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입도 뻥긋 안하고, 일본 애들이 시키는대로 다 했어요.
양말 빨라면 양말도 빨고, 운동복 빨라면 운동복도 빨고.
대신, 걔들이 뛸 때 나도 뛰었어요. 더 뛰고 더 달리고 더 차고.
그때 결심한 게 두 가지 있어요.
베를린 세계 대회를 치루고 돌아오면, ‘1만일 훈련계획’을 시작하자는 거 하나, 그리고 나중에 우리 어린 조선 선수들을 위한 지도계획 체계와 방법론을 세우자고 했던 게 둘.
일본 국기 달고 열심히 뛰었지만, 베를린 세계 대회에서 그리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어요. 그래서 더 미안했어요.
일본한테가 아니라 우리 조선한테.
내가 골이라도 하나 제대로 넣어야 내 다음 어린 선수들이 더 잘 할 수 있고 그럴 기회를 가질 수 있을텐데 하면서 말이에요.
나중에, 우리 손기정이가 금메달을 땄을 때, 고개 숙인 그 모습 보면서, 내가 못한거 니가 해줬구나, 니 마음이 지금 얼마나 아픈지 나도 알겠구나, 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베를린 세계 대회가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1만일 훈련 계획’을 시작했어요.
그때 시작했던 ‘1만일 훈련 계획’이 끝난 게 1979년 1월인데, 끝내고 나니 나한테 말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디다. 노친네 독하다고 말이요.
지도계획 체계와 방법론을 세우고 하는건, 나중에 우리 나라가 해방되고 난 후에야 시작할 수 있었어요.
1948년 런던 올림픽때는, 참 신났었어요.
해방 후에 우리 조선 국기 달고 나가는 첫번째 세계 대회였었죠. 난 그때 코치 겸 선수로도 뛰었었어요.
코치 겸 선수로 뛰었던게, 내가 능력이 대단해서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모든 운동이 다 그렇겠지만, 축구라는 운동도, 재능이 1%라면, 99%는 오랜 시간을 들여 훈련하고 단련이 되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운동이에요. 시대가 시대인지라 나만큼 축구를 훈련받은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거에요.
지금 그 얘기를 하면서 나보고 위대하다고 그러면, 그거만큼 또 쑥스럽고 애가 닳는 이야기가 또 없어요.
그러다 6.25를 거치고, 전쟁이 끝날 즈음에 현역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짓고 완전히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죠. 뿌듯한거보다도, 선수생활 할때보다 더 바짝 정신차리고 긴장했어야 했어요. 내가 조금이라도 잘 못하면 내 다음에 뒤이어 따라올 다른 선수들, 다른 감독들 코치들이 제대로 크지 못한다는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서 동네 한 바퀴,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아댔어요.
1954년에 처음으로 나갔던 스위스 월드컵… 그때 생각하면 난 지금도 눈물이 나요.
일본을 이기고 나간건 정말 속이 시원했는데, 세계 축구가 이루고 있는 정상이 얼마나 높고 험난한지 그때 다시 처음 실감을 했었죠.
게다가, 그때, 우리 구락부 선수들이랑 스위스에 가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쳐댔던지…
후…
경기하면서 우리 선수들한테 그랬어요.
다 져도 좋다, 그렇지만 한 골만 넣자, 그래야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 그 말 하는데 눈물이 핑 돕디다.근데 한 골도 못 넣은거에요. 속이 뒤집어졌지…
국민 앞에 엎드려 석고대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헝가리랑 경기 끝나고 나서 우리 홍덕영이 가슴에 멍든거 보고는, 앞에서는 못 울고 혼자서 울어댔더랬죠.
생전 안 폈던 담배 생각이 그때만큼은 가슴이 타버릴만큼 간절했어요.
그 이후엔 다들 알다시피… 축구인으로서 계속 살아갔어요.
프로축구 팀에서 할렐루야 감독도 하고… 대한축구협회 기술지도 위원장도 맡고…
난 축구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 해볼 수 있는 것,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렸어요.
정말 영광이지…
우리 나라 축구를 위해 딴에는 노력했다고 하지만,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국제 경기에서 거둔 초라한 결과에 비하면… 정말이지… 내가 축구의 이름으로 받은 모든 것들은, 나 개인에게 있어 엄청날만큼 황송한 접대고 과분한 대가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1945년 광복 이전에는, 나에게 있어 축구는 꼭 필요한 존재였어요.
내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축구 때문이었죠.
내게 있어 축구는, 핍박받고 지배받던 식민지의 작은 운동 선수가 가져야 할 분출구이고 감정의 통로이자, 언젠가는 광복이 될 것을 기대하며 준비해야 하는 현실이었어요.
전쟁 중에 축구는, 내게 있어, 인간이라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죠.
그렇게 내게 있어 꼭 필요했던 축구가, 광복 이후, 전쟁 이후에는 바뀌게 되었어요.
나의 존재 가치가, 축구를 위해 있어야 하고, 축구를 통해서 평가받아야 하는 걸로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내게 있어 축구는 구도의 길…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지금 내 육신은 이 세상에 없지만, 내 혼은 여전히 한국과, 그리고 한국 축구와 함께 이 세상에 하고 있습니다.
비록, 내가 몸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우리 한국 축구가 세계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지하에서라도 얼쑤 어깨춤을 출겁니다.
그러니, 모두 다들 힘내십시오.
대한민국 축구의 무운과 건승을, 이 몸, 지하에서 몇 자 올립니다.
- 이 글은, 고 김용식 옹의 일생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쓴 가상 구술 기록입니다. -
익자, 두자를 쓰신 내 아버님께서는 목사님이셨죠.
난 어렸을 때부터 꽤 활달했어요.
10살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지만, 이름을 날린 건 빙상선수로였어요.
상도 좀 받고 이름을 날린 덕에, 자화자찬이지만, 갈래머리 한 여학생들도 날 꽤 좋아했던 걸로 기억해요.
내가 축구를 시작하게 된건, 18살, 경신중학교에 다닐 때였어요.
정말 우연이었지.
실업 전수 학교 구락부랑 우리 경신 학교 축구 구락부가 붙었는데, 그때 우리가 8대 0으로 이겼어요.
그때 날 눈여겨 본 사람들이, 메이지 신궁 대회에 집어넣었는데, 그때 우리 구락부가 우승을 한거에요. 그래서 국가 대표로도 뽑히고 베를린에도 가게 된거요.
그때 내 나이가 스물 여섯이었어요.
불행히도, 그땐 일본 제국 강점기였어요.
난, 가슴에 일장기를 달 수 밖에 없었지.
구락 내에서도, 내가 유일한 조선인이라, 이런 저런 핍박도 많았었어요.
내가 이런 핍박을 받아가면서까지, 내가 내 원수 나라의 국기를 가슴팍에 달고서, 다른 나라에 가서 원수 나라 위해 운동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어요
울분이 하늘을 칠만큼 피가 끓는 청춘이라, 하루에도 열두번씩 짐을 쌌다 풀었다 했어요.
그때, 누군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해줍디다.
‘이 대회는 세계 대회다.
우리 조선이 영원히 일본 치하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조선이 해방되는 그때에, 우리 조선의 국기를 직접 가슴에 달고 운동을 하고 축구를 하게 될 어린 선수들을 생각해봐라,
비록 일본 치하에서지만, 위대한 세계 대회에 나가서 뛰었다는 것은, 그 어린 선수들을 위해 큰 도움과 경험이 되지 않겠느냐.
당신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더 멀리 내다봐라.
당신을 짓밟고 있는 굴욕에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당신이 비겁하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의 뒤를 따라 나오게될 우리 조선의 어린 선수들을 위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정말 크게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입도 뻥긋 안하고, 일본 애들이 시키는대로 다 했어요.
양말 빨라면 양말도 빨고, 운동복 빨라면 운동복도 빨고.
대신, 걔들이 뛸 때 나도 뛰었어요. 더 뛰고 더 달리고 더 차고.
그때 결심한 게 두 가지 있어요.
베를린 세계 대회를 치루고 돌아오면, ‘1만일 훈련계획’을 시작하자는 거 하나, 그리고 나중에 우리 어린 조선 선수들을 위한 지도계획 체계와 방법론을 세우자고 했던 게 둘.
일본 국기 달고 열심히 뛰었지만, 베를린 세계 대회에서 그리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어요. 그래서 더 미안했어요.
일본한테가 아니라 우리 조선한테.
내가 골이라도 하나 제대로 넣어야 내 다음 어린 선수들이 더 잘 할 수 있고 그럴 기회를 가질 수 있을텐데 하면서 말이에요.
나중에, 우리 손기정이가 금메달을 땄을 때, 고개 숙인 그 모습 보면서, 내가 못한거 니가 해줬구나, 니 마음이 지금 얼마나 아픈지 나도 알겠구나, 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베를린 세계 대회가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1만일 훈련 계획’을 시작했어요.
그때 시작했던 ‘1만일 훈련 계획’이 끝난 게 1979년 1월인데, 끝내고 나니 나한테 말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디다. 노친네 독하다고 말이요.
지도계획 체계와 방법론을 세우고 하는건, 나중에 우리 나라가 해방되고 난 후에야 시작할 수 있었어요.
1948년 런던 올림픽때는, 참 신났었어요.
해방 후에 우리 조선 국기 달고 나가는 첫번째 세계 대회였었죠. 난 그때 코치 겸 선수로도 뛰었었어요.
코치 겸 선수로 뛰었던게, 내가 능력이 대단해서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모든 운동이 다 그렇겠지만, 축구라는 운동도, 재능이 1%라면, 99%는 오랜 시간을 들여 훈련하고 단련이 되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운동이에요. 시대가 시대인지라 나만큼 축구를 훈련받은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거에요.
지금 그 얘기를 하면서 나보고 위대하다고 그러면, 그거만큼 또 쑥스럽고 애가 닳는 이야기가 또 없어요.
그러다 6.25를 거치고, 전쟁이 끝날 즈음에 현역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짓고 완전히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죠. 뿌듯한거보다도, 선수생활 할때보다 더 바짝 정신차리고 긴장했어야 했어요. 내가 조금이라도 잘 못하면 내 다음에 뒤이어 따라올 다른 선수들, 다른 감독들 코치들이 제대로 크지 못한다는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서 동네 한 바퀴,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아댔어요.
1954년에 처음으로 나갔던 스위스 월드컵… 그때 생각하면 난 지금도 눈물이 나요.
일본을 이기고 나간건 정말 속이 시원했는데, 세계 축구가 이루고 있는 정상이 얼마나 높고 험난한지 그때 다시 처음 실감을 했었죠.
게다가, 그때, 우리 구락부 선수들이랑 스위스에 가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쳐댔던지…
후…
경기하면서 우리 선수들한테 그랬어요.
다 져도 좋다, 그렇지만 한 골만 넣자, 그래야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 그 말 하는데 눈물이 핑 돕디다.근데 한 골도 못 넣은거에요. 속이 뒤집어졌지…
국민 앞에 엎드려 석고대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헝가리랑 경기 끝나고 나서 우리 홍덕영이 가슴에 멍든거 보고는, 앞에서는 못 울고 혼자서 울어댔더랬죠.
생전 안 폈던 담배 생각이 그때만큼은 가슴이 타버릴만큼 간절했어요.
그 이후엔 다들 알다시피… 축구인으로서 계속 살아갔어요.
프로축구 팀에서 할렐루야 감독도 하고… 대한축구협회 기술지도 위원장도 맡고…
난 축구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 해볼 수 있는 것,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렸어요.
정말 영광이지…
우리 나라 축구를 위해 딴에는 노력했다고 하지만,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국제 경기에서 거둔 초라한 결과에 비하면… 정말이지… 내가 축구의 이름으로 받은 모든 것들은, 나 개인에게 있어 엄청날만큼 황송한 접대고 과분한 대가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1945년 광복 이전에는, 나에게 있어 축구는 꼭 필요한 존재였어요.
내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축구 때문이었죠.
내게 있어 축구는, 핍박받고 지배받던 식민지의 작은 운동 선수가 가져야 할 분출구이고 감정의 통로이자, 언젠가는 광복이 될 것을 기대하며 준비해야 하는 현실이었어요.
전쟁 중에 축구는, 내게 있어, 인간이라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죠.
그렇게 내게 있어 꼭 필요했던 축구가, 광복 이후, 전쟁 이후에는 바뀌게 되었어요.
나의 존재 가치가, 축구를 위해 있어야 하고, 축구를 통해서 평가받아야 하는 걸로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내게 있어 축구는 구도의 길…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지금 내 육신은 이 세상에 없지만, 내 혼은 여전히 한국과, 그리고 한국 축구와 함께 이 세상에 하고 있습니다.
비록, 내가 몸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우리 한국 축구가 세계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지하에서라도 얼쑤 어깨춤을 출겁니다.
그러니, 모두 다들 힘내십시오.
대한민국 축구의 무운과 건승을, 이 몸, 지하에서 몇 자 올립니다.
- 이 글은, 고 김용식 옹의 일생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쓴 가상 구술 기록입니다. -
출처 : 전스액티피아
글쓴이 : 전국주 원글보기
메모 :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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